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쓰자카 다이스케 (문단 편집) === [[일본프로야구]] 시절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마작가2005.webp|width=100%]]}}} || ||<-2> '''{{{#ffffff 헤이세이의 괴물 (平成の怪物) }}}''' || [[파일:2017110601000370100024251.jpg]] 2회 연속 WBC 대회 MVP를 차지한, 역시 영광의 시절을 보낸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파일:f0288069ba3183c1674460d612bec2146715e403_large.jpg]] 1999년 1월 세이부 입단식에서.~~지금과 비교해보면 너무 괴리감이 심하다~~ 왼쪽은 당시 세이부 감독 [[히가시오 오사무]]. [[파일:cam555-jlp00622912.jpg]] 깡말랐던 데뷔 초기 시절.~~지금과 비교해보면 너무 괴리감이 심하다 2~~ ||[youtube(o1v3kNQVPto)]|| || 1999년 4월 7일, [[도쿄 돔]]에서의 [[닛폰햄 파이터즈]]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한 데뷔 무대에서 1회말 투구하는 모습.[br] 평균 구속은 150.1km/h, 최고 구속은 155km/h가 찍혔다. 참고로 이 영상의 제목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충격의 프로 데뷔전'''이다.[* 1번타자 이이데 타츠야 - 2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3번타자 [[카타오카 아츠시]]와 대전하며, 결과는 마쓰자카가 이데와 카타오카는 삼진, 오가사와라는 투수 땅볼로 삼자범퇴시켰다. 이날 경기는 5 - 2로 세이부가 이김과 동시에 마쓰자카가 8이닝 9탈삼진 2실점으로 데뷔 무대에서 첫 승리투수가 되었고, 닛폰햄의 이날 득점은 오가사와라가 8회에 마쓰자카의 생애 첫 피홈런인 2점 홈런을 날린 것이 유일했다. [[http://2689web.com/1999/LF/LF2.html|출처]]] ||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프로 데뷔 첫해인 1999년도에 '''180이닝 16승 5패 평균자책점 2.60'''이라는 신인으로서는 믿기 힘든 스탯을 찍으며 데뷔 첫해에 다승왕,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고[* [[사와무라상]]은 옆 동네에서 같은 해에 데뷔한 대졸 신인 [[우에하라 고지]]가 차지했다. 우에하라는 이 해 20승+센트럴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 고졸 투수로는 33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해 일본 야구계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특히 [[스즈키 이치로|이치로]]와의 첫 대결에서 3연타석 삼진을 뽑아냈고, "자신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멘트를 남겼다. 그리고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2002년을 제외하곤 가공할만한 완투율을 자랑하면서 매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특급 에이스로 군림했다. 특히 3년차인 2001년엔 33경기에 등판해 240.1이닝 15승 15패 방어율 3.60을 기록하면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사와무라상은 수상 과정에 논란이 있었는데, 196.2이닝 동안 187탈삼진 [[방어율]] 2.46[* 센트럴리그 방어율왕(ERA 1위). 일본은 지금도 종종 평균 자책점이라는 용어보다는 방어율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WHIP 1.007, '''[[WAR]] 9.2'''를 기록한 '''노구치 시게키'''나 192이닝 동안 171탈삼진 방어율 2.67 WHIP 1.37의 [[이가와 게이]]를 제치고 마쓰자카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노구치(12승 9패)나 이가와(9승 13패)는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인 15승을 기록하지 못한 게 컸고, 이닝 차이가 상당했기 때문. 마쓰자카는 당시 양대리그를 통틀어 유일한 15승 투수였던데다가 저 둘보다 44이닝이나 더 먹은 240.1이닝에 214탈삼진이라는 말도 안되는 볼륨을 기록하며 저 둘에 비해 누적스탯을 더 쌓았기 때문. 지금 관점으로는 저 둘, 특히 노구치에게 비율 스텟(방어율 2.67>3.60), 세부 스탯(BB/K 등. 이닝당 삼진도 그렇고, 볼넷 개수부터가 24개 vs 117개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세이버 스탯(WAR 9.2>6.5)[* 물론 당시는 세이버스탯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WAR]]이 뭔지도 몰랐던 시대이기에 [[WAR]]을 근거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일본에서 지배적인 관점인 방어율이나 승률을 근거로 '방어율이 딸리고 패가 승만큼 많은데 쟤가 왜 최고 투수야?'하는 의견이 많았던 것.]이 모조리 밀리는 다승왕 마쓰자카가 15승 15패로 승률마저도 별로였지만 --볼륨빨로-- [[사와무라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것은 오히려 [[WAR]] 9.2[* 여담으로, 이 [[WAR]] 수치는 1980년 시즌부터 2019년까지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를 양대리그 통틀어 살펴봐도 무려 3위에 해당하는 놀라운 기록이다.(순위는 Delta 및 NPB stats 사이트 기준. 참고로 9.2의 [[WAR]] 수치는 delta 기준.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는 [[WAR]] 7.8기록.) --마쓰자카의 커리어 하이 시즌인 2005년 보다도 수치가 높다...-- 참고로, 1위와 2위는 각각 [[WAR]] 11.5와 9.8을 기록한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와 [[다나카 마사히로]](이 [[WAR]] 수치는 delta 기준. 참고로,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는 각각 9.6과 8.1의 [[WAR]]기록.). 이 문서의 주인인 마쓰자카의 단일시즌 최고기록은 2005년에 [[WAR]] 8.9의 기록(delta 기준.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는 2005년 [[WAR]] 7.3 기록.)이다. 참고로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NPB]]는 역사적인 [[타고투저]] 해의 연속이었다. 지금이야 [[투고타저]] 리그라는 인식이 팽배한 [[NPB]]지만 2001년 당시에는 기록적인 타고투저의 원년이었고 때문에 노구치의 기록이 더 빛났던 것.(특히, 2003년과 2004년의 퍼시픽리그의 타고투저가 그 절정이었다!) 그리고 2011년은 반대로 기록적인 투고타저의 해(투신타병에 가까운...)였고 이 때문에 서로 간의 리그 환경이 워낙 극과극이라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와 [[다나카 마사히로]]와 2001년의 노구치 시게키의 기록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의 세이버 스텟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 사이트인 delta와 npb stats 사이트에서는 80년대 이후 전체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지만, 또 다른 유명 사이트인 ranzan을 기준으로한 [[WAR]]에서는 노구치의 기록이 전체 3위가 아니니 출처에 따라 [[WAR]]에 관한 기록은 달라질 수 있다.]의 노구치 시게키였지만, 자격 미달로 받지 못하는 웃픈 일이 발생한 것. 실제, 마쓰자카도 당해 승률 50%로 사와무라 상 수상 자격 기준인 승률 60% 이상을 기록하지 못한 데다가 평자책도 3점 중후반대로 수상 자격 기준인 2.50 이하의 평자책을 만족하지 못해 전항목을 달성하지 못하여 수상하지 못할 뻔 했다.[* 다만, [[사와무라상]]의 경우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임팩트가 뛰어나다면 한 두개 미달 정도는 눈감아주고 수상시켜주기도 한다.] 전년도인 2000년도에도 수상자가 없었고 원칙대로 수상자를 고르면 2년 연속으로 수상자 후보가 없자 선정위원회에서 비록 마쓰자카가 자격 미달이긴 하나 격려 차원에서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사와무라 상]] 수상이 정말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문과 함께 [[http://mksports.co.kr/view/2021/1091268/|수상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사례로 2001년이 언급된다. 실제 '''노구치 시게키'''는 12승 9패로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에 단 3승 차이로 부족했고 노구치 시게키의 승운만 따라줬다면 마쓰자카는 수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노구치 시게키는 당해년도 다른 수상기준인 25경기 이상 등판, 10경기 이상 완투, 2.50 이하 평균자책점, 150개 이상 탈삼진 등의 항목은 달성하였다. 하지만, 부진한 팀 상황때문에 승수와 승률 면에서 손해를 보게되며 전항목을 달성하는데 실패했다.[* 마쓰자카도 평균 자책점과 승률 면에서 전항목 달성에 실패하였다.] 또한,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이 제정된 원년인 1982년 이후로 전항목을 달성한 투수는 11명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보통 한 두개 정도 미달되어도 기록이 뛰어나면 수상을 하는 정도였다. 고로, 저 정도 성적이면 어지간하면 상을 받는 성적인데 당해년도에 마쓰자카에 밀리며 아깝게 수상 기회를 놓쳤다. 당시 '''노구치 시게키'''의 소속팀은 [[주니치 드래곤즈]]였는데 2001시즌 당시 승률 0.456으로 센트럴 리그 5위를 하며 리그 꼴찌에 가깝던 시절이다. 참고로 당시 주니치는 62승을 기록했는데 그 중 노구치가 12승을 기록했으니 혼자서 팀 전체 20%의 승리를 책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 주니치의 타자들의 시즌 평균 WRC+는 83으로 퍼시픽리그에서 훌륭한 타격을 보여주던 마쓰자카의 소속팀 세이부의 WRC+103과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이뿐 아니라, 거의 모든 타격 지표에서 센트럴, 퍼시픽을 통틀어 주니치는 밑에서 2등 수준을 기록했다. 그리고 노구치가 등판하는 날마다 유독 팀 타자들이 찬스에서 말아먹는 경우도 많았으며 승운과 팀 타격 지원 모두 노구치는 부족했다. 여러모로, 2001년 수상은 마쓰자카에게 운이 따라줬다고 봐야 할 듯 하다. 게다가, 2001 시즌에 볼넷 허용률 / 볼삼비 / ERA + / FIP + / WAR / WHIP / 피안타율 모두 '''노구치 시게키'''의 우위이며 서로 간의 [[WAR]]은 대략 1.5배의 차이가 난다. 선발 투수의 승리에 선발 투수 스스로가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 된 현재, 세이버메트릭스의 총체를 대변하는 격인 [[WAR]]도 꽤 차이나니 여러모로 '''노구치 시게키'''가 마쓰자카보다 2001년에 훌륭한 투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발 투수의 [[투승타타|승수]]를 중시하던 당시의 시대상과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하지 않았던 덕에 마쓰자카는 운이 따라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사와무라 수상에 승률, 투수 승수를 중시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세부 스탯 세이버 스탯을 중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1999년 87볼넷, 2000년 95볼넷 2001년 117볼넷으로 제구력이 썩 좋은 투수는 아니었는데 2002년에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고 딜리버리를 수정~~했지만 부상으로 폭망~~한 이후 2003년부터는 볼넷 허용률도 눈에 띄게 줄이면서 완전체 투수로 성장했다. 참고로, 2001년 마쓰자카의 기록은 볼 넷 허용률 / 볼삼비 / [[WAR]] / WHIP / 피홈런 / ERA+ / FIP+ / 피안타율 측면에서 그의 최전성기 시점인 2003년부터 2006년 시점 기록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나마 팔을 갈아 소화한 이닝과 탈삼진 갯수만 많은 것이 2001년 기록상 유이한 우위. 즉, 그의 [[NPB]] 시절 최전성기의 시작인 2003년부터 [[MLB]]로 건너가기 전 마지막 해인 2006년까지의 기록은 비율 스텟, 세부 스텟, 세이버 스텟 모두 그 이전 시점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탈삼진 갯수 혹은 이닝 소화 등 스텟의 볼륨적인 면을 빼고는 2003년 이전 기록을 2003년 이후의 기록에 비교하는 것 조차 실례라는 소리. 하지만, 상술하였듯이 최전성기 시점이 아닌 2001년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마쓰자카는 최전성기가 아닌 2001년에 [[사와무라 상]]을 딱 한번 타봤다. 정작, 본인이 [[NPB]]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혹은 [[이가와 케이]]같은 선수들에게 밀리며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쓰자카의 커리어에서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youtube(PzB6ytwBjAc)]|| [[2004년 일본시리즈]]에 출전해 팀을 일본제일로 이끌었다. 무서운 건 6차전에 선발등판하여 승리를 거두고 7차전 7대2로 앞선 8회말에 구원등판하여 [[홀드(야구)|홀드]]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비슷한 장면이 9년 뒤 연출된다.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라쿠텐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6차전에서 160투구를 하고도 패했는데 7차전 마지막 이닝에 등판하였다. 2004년 7차전은 [[나고야돔]]에서 했지만 2013년 7차전은 비가 내리는 [[미야기 구장]]에서 펼쳐졌고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 구종은 무려 슬라이더였다.] 참고로 [[헹가래 투수]]는 9회말에 등판한 도요다 기요시이다. 2006년 [[사이토 카즈미]]와 투수 부문에서 치열하게 경쟁했고 마쓰자카는 17승 200탈삼진 방어율 2.13 등 무시무시한 스탯을 찍었지만, 사이토는 18승 205탈삼진 방어율 1.75 승률 0.783 투수 부문 4관왕을 차지했다. 그 해 사와무라상은 사이토가, 골든글러브는 마쓰자카가 가져갔다. 이 둘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 맞대결했는데 마쓰자카가 완투승을 거뒀다. 그러나 팀은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까지 [[NPB]] 통산 8년 동안 평균자책점 2.95, WHIP 1.14, 204시합(190선발) 108승 60패 '''72완투 18완봉 완투율 38%(!)'''[* 훗날 '''왜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완투를 안하죠?'''라는 드립을 치게 될줄 누가 알았을까.(...)] 1402.2이닝 1355삼진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찍고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게 된다.[* 가끔 비교가 된 [[우에하라 고지]]의 성적은 같은 기간 평균자책점 3.02, WHIP 1.03, 195시합(193선발) 102승 54패, 56완투 9완봉, 1391⅓이닝, 1236삼진이다.] ||이 글들은 당시 마쓰자카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현지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을 확인했지만 마쓰자카를 능가할만한 투수는 보이지 않았다. 마쓰자카는 지구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기량을 갖췄다. 최고구속 156km/h의 강속구에 수준급의 다양한 변화구를 정교하게 던진다. * [[그렉 매덕스|매덕스]]는 마쓰자카만큼 빠른 공을 던지지 못했다. 오히려 변화구의 예리함은 마쓰자카가 더 나아 보인다. 한마디로 마쓰자카는 95마일(153km/h)을 던지는 매덕스다. 당장 내년부터 [[로이 오스왈트]](2006년 15승 8패 평균자책점 2.98 기록)와 비슷한 수준의 피칭을 선보일 것이다. - [[바비 발렌타인]] * 25승에 [[사이영상]]이 가능하다. - [[커트 실링]] * 마쓰자카는 최고다. 내가 그에게 배워야 한다. - [[팀 웨이크필드]] * 마쓰자카는 [[로이 오스왈트|오스왈트]]와 동급이다. - [[세이버메트리션]]들 * 마쓰자카에게서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느꼈다. - [[데이비드 오티즈]] * 메이저리그 어느 누구도 마쓰자카와 비교될 수 없다. [[요한 산타나]]도 그보다 아래이다. - [[ESPN]] 현지 해설가 * 홈런을 쳤지만 운이 따라준 것이다. 마쓰자카의 공은 누구도 칠 수 없다. - 데이비드 데헤수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